설교단상

  • 홈 >
  • 설교 >
  • 설교단상
설교단상
12월6일 예배 (최종원 목사)설교 말씀 요약 박경옥 2020-12-10
  • 추천 2
  • 댓글 1
  • 조회 748

http://undukm.onmam.com/bbs/bbsView/14/5834129

"하나 됨은 다가섬으로 시작한다"

그러니 "가까이 다가 서시오"(קָרַב, 카라브)!!! 

그러니 "가까이 다가 서시오"(קָרַב, 카라브)!!! 

           -에스겔 37장 11-17절

 

에스겔 37장은 구약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말씀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전 587년, 이스라엘은 고대 바벨론 제국에 의하여 땅도 짓밟히고, 가족들도 모두 찢겨지고, 포로로 잡혀가고, 남은 것은 절망만 남았습니다. 생명이 남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면 감사한 일입니다. 강원도의 크기와 비슷한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진지 340여 년이 지난 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매우 오랫동안 이 본문의 말씀은 통일의 소망으로 성도들에게 많이 애독되었습니다. 

 

본문은 “여호와의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라고 쓰면서 에스겔의 예언의 상황을 소개합니다. 이 표현에 관하여 에스겔 예언자는 '환상'이라는 이야기 도구를 사용하면서 모두 4번 언급합니다. 첫 번째 환상은 3장 22-27절로 (언어 장애)말할 수 없을 것이라는 임무를 받을 때 사용됩니다. 두 번째 환상은 8-11장으로 성전 파괴와 함께 언급되며, 세 번째 환상은 오늘 본문인 37장 1-14절에서 나타나고, 마지막으로 네 번째 환상은 새로운 성전을 소개하는 40-48장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처음과 세 번째 환상은 동일하게 포로된 장소에서 발생하는 내용으로 소개되고 있고, 두 번째와 네 번째는 새로운 성전에 대한 환상으로 소개하면서 각각 비슷한 상응관계로 구성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배경은 포로로 잡혀간 땅에서 발생한 사건이며, 예언자는 그 낯선 땅에서 환상의 도구를 사용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미래에 대하여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만나는 말씀은 37장 1-6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마른 뼈'에 대한 언급입니다. '마른 뼈'는 죽어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표현 그대로 생기가 없음을, 죽음을 상징합니다. 죽어 있으되, 더 이상 살아날 가능성이 제로임을 알려주고자 ‘마른 뼈’라고 재차 토를 달 듯이 반복하여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완전히 무력화되어 전의를 상실한 공동체의 모습은 그야말로 처참한 모습으로 세상 속에 버려진, 죽은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버려진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지난 주에 계속 방영되었던 냉장고에서 발견된 갓난 아기의 시신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참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학은 AI의 시대가 왔고, 모든 편의시설은 자동화가 되어 인간은 점점 더 편안한 시대에 살아가고 있으나, 여전히 우리의 사회 어두운 곳에서는 그렇게 방치된 아이들, 버려진 자녀들은 우리 주위에 아직도 버젓이 존재하며 일상인 것처럼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뼈아픈 현실을 마주하는 풍부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이 일에 얼마나 공감하며 또 그들과 함께 공존을 꿈꾸며 살아가려고 하기나 하는지 감히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언자 에스겔은 역사 속에서 경험했던 그 ‘버려짐’을 버리지 않습니다. 머리에 담고, 가슴에 담고, 신앙에 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버려짐이 결코 끝이 아님을 알리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은 절대 버리시는 분이 아님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에스겔 1장부터 하나님은 당신의 보좌를 움직여,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이스라엘 Diaspora들과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버리시는 분이 아님을 예언자 에스겔은 강조합니다. 오히려 고난 속에서 함께 고난을 당하고, 아픔 속에서 함께 아픔을 나누고 계심을 강조 합니다. 

 

이러한 마른 뼈에 대한 신앙의 사고는 전통적으로 선배 신앙인들로부터 물려받았습니다. 에스겔은 전형적인 포로기 예언자로 그의 선배 예언자인 예레미야로부터 많은 부분에서 말씀의 전통을 수용합니다. 예레미야 8장 1~2절에서 소개합니다: “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때에 사람들이 유다 왕들의 뼈와 그의 지도자들의 뼈와 제사장들의 뼈와 선지자들의 뼈와 예루살렘 주민의 뼈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2 그들이 사랑하며 섬기며 뒤따르며 구하며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 별 아래에서 펼쳐지게 하리니 그 뼈가 거두이거나 묻히지 못하여 지면에서 분토 같을 것이다.” 묻힌 관을 다시 꺼내어, 거기에 담겨진 뼈를 사방에 흩어버리는 것은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저주 중에 저주입니다. 이러한 사건이 벌어지듯이, 그야말로 저주 아래 있는 이스라엘의 상황은 최악입니다. 

 

이 저주 아래 살아가면서, 예언자는 과감하게 레위 제사장 법에 의하면 죽은 자들을 만지면 부정하다는 정결법을 어겨가면서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죽은 뼈가 가득한 골짜기를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결국 3절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라고 물으시면서, 버려진 세계, 곧 죽음의 세계까지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알리고자 합니다. 이 질문에 에스겔은 대답할 수 없었고 입을 열수 없었습니다. 이 질문은 지극히 적극적인 하나님의 왕적 통치를 표현하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입니다. 모든 것을 가능케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가 너무 깊습니다. 많습니다. 그래서 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유명한 구절은 요한복음 11장에서 언급하는 나사로의 상황을 소환합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고 난 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두려워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죽음의 권세를 이긴다는 것은 곧 정치-사회적인 억압에 당당히 맞섬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두려워합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신앙의 세계입니다. 예수 따름은 세상의 권세에 당당히 맞섬을 의미합니다. 그 맞섬은 때로는 신앙의 순교로 때로는 묵묵히 가난한 자의 이익을 보호하는 운동으로도 나타나기도 합니다. 마치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흑인의 인권을 대변하듯이 그렇게 거리를 거닐며, 누군가에게만 허락된 길이 아니라 모두가 걸어다닐 ㅈ수 있는 보편적인 길을 알리고자 예수님의 저항의 길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포로기를 맞은 이스라엘에게는 이 하나님의 왕적 통치 신앙의 모습이 사라졌던 것입니다. 오히려 구약에서는 우상을 섬기는 일로 묘사되면서 그 신앙의 세계가 무너져 내렸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까? 4절입니다: “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새로운 상황은 다가오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여호와의 말씀에 집중하여 듣는 것이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는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존재 자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말라버린 이스라엘에게 생기를 주어 다시 살아나게 할 것입니다. 예언자는 매우 단호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마른 뼈를 사랑하기 때문에 살릴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6절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라고 기록하듯이, 하나님이 당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하여 마른 뼈를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반드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예언자는 감정이 아닌 의지의 모습으로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이스라엘의 미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상황은 7-10절에서 다시 반복하며 적극적으로 뼈들이 살아나는 모습으로 발전합니다. 이 생생한 부활의 사건은 오늘날 세상의 염려와 무의미함에 시간을 투자하는 신앙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메세기가 됩니다. 7절입니다:“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קָרַב, 카라브)” 

 

'살아남'이 무엇입니까? '부활'이 무엇입니까? 그 시작은 분명 ‘서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연결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연결(קָרַב), 하나가 되는 것은 ‘서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서로 연결되는 것’은 ‘가까이 다가섬’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공동체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서로서로 돌아보고 한 걸음씩 다가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걸음 다가서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됨을 우리는 오늘날까지 공동체를 섬기면서 많은 부분에서 경험해왔습니다. 그리고 매우 어려운 이 코로나 시기에 내년도 사역을 위하여 자신의 일을 기꺼이 멈추고 공동체의 연합과 주님의 사역을 위하여 공동체를 위한 사역에 가까이 다가선 언덕의 모습이야말로 살아나는 교회요 부활의 교회요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는 교회입니다.  

 

물론 구약에서는 육체의 부활에 대하여 소개하지 않습니다. 다만 유대교에서는 적어도 ‘기독교 초기 시대’에는 어느 정도 정립된 사고였습니다. 역사적으로 주전 167~164년에 일어난 마카비 전쟁 시대를 소개하는 다니엘서 12장에서 우리는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 12장 2-3절입니다: “2.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다니엘의 역사성은 에스겔의 역사를 많이 닮아있습니다. 이 역사에서 이스라엘은 하나같이 소망 없고 죽어있는 자들로 소개됩니다. 본문 11절에서 이스라엘은 그렇게 스스로 고백합니다: “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그런데 다니엘서가 순교한 자의 부활 소망을 드러내고 있다면, 에스겔은 '우상 숭배로 버려진 백성' 안에서 부활을 소개합니다. 버려진 그들은 부활의 소망 가운데로 인도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에스겔은 분명 자연의 현상을 뒤집어버리는 사건인 부활이란 주제를 죽음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표현하는 신앙체계로 선언합니다. 신명기 32장 39절의 말씀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와 같이 에스겔에게 있어서 부활 소망은 생명의 근원되신 분, 죽이기도 하고 실리기도 하시는 분에게 그 근원이 있음을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죽음은 생명을 수여하는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 아니며, 오히려 죽음도 이길 수 있다는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신앙 선언인 것입니다. 

 

이렇게 에스겔은 하나님의 권능을 ‘하나님의 영’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이 본문에서 주요한 핵심적인 기능을 합니다. 1절에서 ‘하나님의 영’은 에스겔을 마른 뼈가 가득한 골짜기로 인도하셨고, 8절에서 ‘생기’를 통하여 살아나게 될 이스라엘을 표현할 때, 이 ‘생기’가 바로 ‘하나님의 영’, 루아흐입니다. 이렇게 이 ‘영’은 뼈와 뼈들이 서로 연결되게 하여 생기를 불어넣는 일처럼, 마치 태고적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와 같은 사건이 바로 이 본문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건의 가장 중심에 ‘하나님의 영’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감히 에스겔은 14절에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선포합니다: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지금 역사는 뒤틀려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뒤틀려있는 역사에서 다가올 미래에 재창조된 역사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끄실 이스라엘 공동체의 미래가 현실이 될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 언덕 공동체가 곧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옷을 입은 공동체임을 인정하게 될 것임을 증명해주는 말씀이기도합니다. 

 

이렇게 1-14절까지의 ‘뼈들의 연합’ 선언은 15절 이후에서 이스라엘의 재통일 사건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그 분명한 선언은 16절에서 먼저 만나게 됩니다: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가지고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인자', 이 용어는 육체의 한계를 가진 자에 대한 통합적인 사고의 표현입니다. 다만 이 표현이 신약 공동체에서는 한결같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 대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에스겔은 인간 그 자체로서 죽음을 극복하기를 소망하는 한 신앙인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인자'를 부릅니다. 그러면서 갈라지고 피폐해진 이스라엘의 남과 북의 통일을 소망하며 매우 강력한 하나님의 의지가 담긴 부르심으로 ‘인자’를 부릅니다. 

 

오랫동안 이스라엘은 재통일의 꿈을 꾸며 살아왔습니다. 주전 930년 경 솔로몬의 후계자 르호보암이 통일된 나라를 수습하지 못하고 두 나라로 갈라진 이래, 587년 바벨론에 의해 무너져 내린 그 날까지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선한 왕들이 간간히 재통일의 꿈을 꾸었습니다. 역대하 30장 (1-12절)에서 히스기야 왕은 북왕국이 무너진 뒤로 그들을 재통합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그의 증손자 요시야 왕은 북부의 몇몇 지역들을 회복하였으나, 결국 므깃도에서 전사하므로 그 일을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호세아는 1장 10-11절에서 재통일의 소망을 담고 예언하고 있으며, 이사야는 11장 12-13절에서, 예레미야도 3장 6-18절 그리고 30장 1-9절에서 끊임없이 통일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북쪽 지파 연합을 가리켜 이스라엘로, 남쪽 유다와 베냐민, 시므온 지파를 가리켜 ‘유다’라고 불렀지만, 에스겔은 ‘유다’ 라는 말보다 ‘이스라엘’이라는 말을 더 선호하였고, 11절에서도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무너지니까 전체가 보인 것입니다. 이에 에스겔 20장에서 ‘이스라엘’은 더 이상 나누어진 이스라엘을 명명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고는 계속해서 신약시대의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도 이어졌습니다. 그 한 예가 누가복음 15장의 ‘잃어버린 양, 동전, 아들’에 관한 비유에서 그 배경으로 소개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 시대는 여전히, 교회의 재통일은 인간의 영원한 숙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인간의 다양한 신학적 사고와 정치적 의지는 개신교의 몸을 갈갈이 찢어놓았고, 더 이상 서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픈 상처를 남긴 채, 망망대해를 떠도는 배와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바다인 광야를 떠도는 포로기 예언자 에스겔은 그 통일의 소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17절입니다: “그 막대기들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또 다시 ‘서로 연합하다’(קָרַב)라고 쓰면서, 일치된 이스라엘, 하나된 이스라엘을 선포합니다. 결국 하나가 되는 일은 ‘서로 가까이 다가섬’을 뜻합니다.

그러니 "가까이 다 서시오"(קָרַב, 카라브)!!! 그러니 "가까이 다 서시오"(קָרַב, 카라브)!!!

 

하나가 되는 일은 예언자 선배들을 통해서 소개했듯이, 그 사건은 종말론적인 목표입니다. 종말론은 세상의 끝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성취하실 역사의 완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 언덕은 오늘날 사회적으로 나누어진 계층들의 하나 됨을 위하여 최초의 아담으로서 또한 종말론적 이상을 품고 있는 인자의 모습으로서 스스럼없이 위 아래 모든 계층들에게로 가까이 다가가야 하겠습니다. 이는 정치적인 이익이나 또 경제적인 이익을 배제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이 땅에 기꺼이 다가오신 예수님의 그 길을 바라보며 그 모든 한계에 부딪힌 인자들에게로 다가서기 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한계를 열어버린 에스겔의 그 힘찬 선포의 현장에서 다시 한 번 신앙으로 무장하여 나아가기 원합니다:12절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우리가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공유하길 원합니다: “우리 언덕이여, 하나님께서 무덤을 열고 여러분을 거기에서 나오게 할 것입니다!”

 

    추천

댓글 1

  • 박창훈 2020.12.12 11:09

    고맙습니다.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12월 13일 예배 (김태완 목사)설교말씀 요약 [1] 박경옥 2020.12.13 2 714
다음글 11월22일 (박창훈 목사)설교 말씀 요약 [1] 박경옥 2020.11.22 2 6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