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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1일 예배 (박창훈 목사)설교말씀 요약 박경옥 2021-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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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왕, 하나님의 아들” 

(요한복음 19장 1절-16절)++ 

 

- 본문은 앞 장에서부터 이어지는, 예수님에 대한 빌라도의 재판과정을 계속 다루고 있습니다. 빌라도의 재판과정이 꽤 길게 느껴지는데, 실제로 예수님과 빌라도의 만남은 요한복음 18장 28절에서부터 19장 16절까지, 스물여덟 절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재판과정이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 과정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빌라도의 심리적인 변화를 자세히 읽을 수 있습니다. 

 

18장 36절에서, 예수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고 질문하는 빌라도의 질문은 진리에 대한 바람직하고 참신한 질문이거나 또는 빈정거림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유월절 식사를 지키며 하나님의 어린양은 죽이려는 모순과 반역자는 살리고 하나님의 아들은 죽이라고 외치는 유대인들의 역설적인 상황에서,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정말로 이 세상에 진리가 있기나 한 것이냐?”라고 되묻는 것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변하고,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제대로 좀 알고, 이 냉혹한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재촉하는 빌라도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기 위해, 여기에 자신이 이렇게 서있다고 증언하는 예수님의 간절한 대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사실 예수님이 피고석에 서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빌라도 자신이 심판을 받고 있다는 인상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사실 19장은 빌라도를 설득하는 유대인들의 끈질긴 모습과 함께, 처음부터 무죄를 확신했고, 예수님과 대화를 통해 점점 더 무죄를 확신하던 빌라도가 끝내는 죄 없는 사람을 죽음의 길로 밀어 넣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처음 설교제목을 “유대인과 빌라도의 공조(공모)”라고 정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긍정적인 의미를 전달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제목을 예수님의 죄명에 해당하는 두 개의 주제어로 다시 고쳤습니다. 

 

그것은 바로 3절에 나오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과 7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유대인의 왕, 하나님의 아들 이 두 가지는 피고인 예수님에 대한 공소장의 타이틀이며, 예수님에 대한 죄명이었습니다. 그렇고 보니 유대인의 왕과 하나님의 아들은 오늘의 본문을 전체적으로 설명하는데 중심적인 용어가 되며, 사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고백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첫째로 유대인의 왕이라는 호칭입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제시한 유죄의 근거였습니다. 빌라도가 18장 33절에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처음에 물어본 것으로 보아서, 예수님이 사형에 해당한다고 답을 정해놓은 유대인들이 처음 제시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자신들의 왕으로 자처하면서, 제국 로마에 대한 반역과 반란을 선동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치범에게 내려지는, 로마의 가장 강력하고 끔찍한 처형인 십자가형에 해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유대인의 왕”이냐고 질문하는 빌라도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왕이니라”고 대답하셨지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는 설명을 들어야 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의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것 같지는 않지만, 국가전복의 의도가 있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19:1에서 채찍질을 한 이유가 예수님을 놓아주려는 빌라도의 가상한 의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채찍질을 하고,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씌운 후에, 자색 옷을 입혔으니, 너희들이 주장하는 “유대인의 왕”을 한 번 보라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이용해 유대인들에게 퍼포먼스를 한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너희들이 말한 이 사람을 보라고 하면서, 한편으로 당사자에게는 모욕을 주고, 다른 한편으로 기소한 유대인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데, 뭐 “유대인의 왕”이니 하면서 호들갑들을 떠느냐고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방면하려고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판장인 빌라도가 무죄를 확신하고 있으며, 그냥 방면할 것으로 보이자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의 주장은 더 강력해졌습니다. 6절에서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강력하게 외칩니다. 단순히 모욕을 주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주장하면서, 실제로 로마에 대한 반역과 혁명적인 활동을 했다고 아주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 따르면,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로 단순히 종교적인 상징이나, 은유나 고백의 차원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물리적이고 정치적인 왕이라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도는 자신의 무죄확신을 굽히지 않고, 6절에서 그렇다면 유대인 너희들이 직접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자신은 이 사건에서 손을 떼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처음 제시한 죄목인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은 분명히, 처음에는 빌라도의 동의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두 번째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사형에 해당한다고 두 번째로 들고 나온 죄목입니다. 유대인들이 십자가형을 집행할 수는 없었지만, 죄인을 돌로 쳐서 죽이는 것이 가능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7절에서 유대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주장만으로 빌라도를 설득할 수 없게 되자, 그 죄목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에 더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로마인들의 법만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법을 동시에 어겼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전혀 다른 성격의 말입니다. 유대인의 왕은 한 나라의 국민과 영역과 주권에 대한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세상 전체를 포괄하는 말이며, 세상에 있는 사람 모두에 해당하는 말이 됩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은 정치적인 말로 해석이 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종교적인 말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무죄를 확신해서 두 번이나 방면하려고 시도했던 빌라도가 바로 이 말에 마음이 흔들립니다. 

 

8절에서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유대인의 왕이라는 주장에 흔들리지 않던 빌라도의 확신에 균열이 생긴 것입니다. 더욱 두려워했다는 것에서, 이미 앞에서부터 자신의 개인적인 확신과 사형을 요구하는 유대인 무리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고민을 하던 차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9절에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다시 만납니다. 예수님을 마주한 빌라도는 “너는 어디로부터냐?”고 질문합니다. “예수님은 어디로부터 왔는가?”라는 질문은 사실 요한복음에서 계속해서 관심을 갖고 반복해서 주장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빌라도의 질문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밝히고자 하는 요한복음의 의도를 반영할 수 있는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묻는 빌라도에게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분명히 요한복음의 독자들은 그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빌라도에게 한 마디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과정과 사연과 이야기가 놓여있습니다. 그러자 답답한 빌라도는 자신이 예수님에 대한 생사여탈의 권한이 있다고 힘을 주어 강조합니다. 10절에서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라고 하면서, 뭐라고 사정이라도 해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그 알량한 양심이 가리키는 무죄를 언도할 수 있도록, 다급한 예수님 자신이 근거를 제시하라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심적인 말씀을 11절에서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업었으리니”라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빌라도의 권한 그 위로 권한이 있다는 말이면서, 바로 예수님 자신이 지금 현재 최고의 결정권을 누리는 빌라도 자신보다도 더 높은 곳에서 왔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빌라도가 현재 누리고 있는 권한도 그리고 지금 예수님의 생명을 가지고 흥정을 하는 이 모든 권한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생명의 권한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빌라도는 하나님의 권한 가운데 아주 작은 몫을 맡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이 말에 빌라도는 자신의 무죄확신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더욱이 유대인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예수님을 방면하면, 황제의 충신이 아닌 것이 된다는 논리를 펴고, 스스로 왕이라는 사람은 반역에 해당한다고 말하자, 정신이 번쩍 든 것입니다. 그래서 13절에서 빌라도는 재판석에 앉아서 유대인 종교지도자들과 무리들이 요구하는 목소리에 자신의 양심을 놓아버리게 됩니다. "재판석에 바로 앉았다"는 말은 빌라도가 군중의 심각한 반응을 뼈저리게 감지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자신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자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그 많던 무리들이 있었는데, 만약에 이렇게 예수님을 방면한다면, 흥분한 무리들이 걷잡을 수 없이 들고 일어날 것임을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라고 죽이라고 소리치며, 십자가형을 요구하는 유대인들에게 동의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재판은 빌라도의 책임아래 유죄로 결론 내려졌고, 십자가형이 판결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형은 오로지 악한 동기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 아니 때로는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악한 일이 도모될 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상식이나, 합리성이나, 건전함에 의해서도, 악한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인간이 현실에서 마주하는 악의 세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악한 일은 악한 사람들을 통해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생각이 없거나, 아니 때로는 선한 의지와 뜻을 가지고 시작한 일에도 악한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을 때는 그 과정과 절차와 결과에 있어서도 끝까지 선할 수 있도록 세심한 노력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런 집단의 악에 대한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은 유대인들과 빌라도가 벌이고 있는 이런 협잡과 야합과 공모에 대해서, 아무런 대꾸도, 항변도, 변호도 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일을 그대로 두시는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앞날을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유대인들과 빌라도라는 타인들의 의지와 흥정과 거래에 맡기고 계십니다. 그리고 정말로 바닥까지 추락하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자신의 목숨에 대해서, 그리고 이후에 남겨질 자신에 대한 평판에 대해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한 사람 예수님을 봅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삶의 길, 바로 몇 시간이면 끝나는 바로 그 길을 가는 인간의 나약한 모습입니다. 광기로 들뜬 종교인들과 권모술수에 계산이 빠른 정치가의 공모를 보면서, 그저 나약한 한 인간의 무기력하고, 처참하고, 동정심조차 일으키지 못하는 가장 비참한 모습을 봅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아무런 도움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에게서 보아야 할 삶의 모습은 사실은 가장 적극적인 모습입니다. 한 사람을 죽이려고 협잡하는 이들을 향해서, 그들 위에 있는 권한, 그 협잡의 공모 위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신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는 가장 적극적인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판과 그리고 이후로 벌어지는 십자가의 모습은 무기력한 인간의 가장 나약하고 처참한 비극적인 모습이지만, 그분은 가장 적극적이고 치열하며 주도적인 결정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 속에서 보고 깨닫고 따라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불합리하고, 부조리하고, 말도 안 되는 바로 상황속에서, 과연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을까요? 세상의 악한 세력의 온갖 술수와 계략과 협잡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을까요? 절대적으로 선한 사람으로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누구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기회만 있으면 하나님 말씀을 의지하며 선한 행실로 살아왔는데, 전혀 생각지도 않은 어려운 일에 휩싸일 때가 있습니다. 또는 최선을 다해 준비한 일이 지체되고 어긋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생각하지도 못한 순간, 갑자기 삶을 정리하고 마감해야 하는 순간을 마주하게 됩니다. 바로 그 때 우리는 그 사건들 위에 진정한 권한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을까요? 

 

바로 오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바로 그 길을 가신 주님께서는 우리도 주님의 길을 따를 것을 기대하면서, 그 외롭고 힘들고 고통스런 십자가의 무게를 이기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믿음이라는 단어의 정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십자가로 나가는 길을 '묵묵히 그리고 적극적으로' 발을 내딛는 주님의 모습을 철저히 묵상하면서, 우리에게 놓인 십자가의 길을 따르길 바랍니다. 빌라도의 재판 과정에서 예수님께서는 18:37에서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마주한 험한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내라는 그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왕'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절실하고 간절하게 고백하며, 그분과 함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묵묵히 그리고 적극적으로' 따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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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박창훈 2021.3.25 18:00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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