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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0일 예배 (박창훈 목사)설교 말씀 요약 박경옥 2020-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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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장8~14절

"밤에 일하던 목자들을 위하여"

 

누가복음에는 유대인들이 수백 년을 기다리던 그 분이 오시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누가복음 1장에 따르면, 사가랴라는 제사장을 통한 세례 요한의 출생소식, 그리고 태중의 아이를 알아본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의 위로를 통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다짐한 처녀 마리아의 조용한 믿음의 결단 등 이런 몇몇 사람들의 행동과 삶을 통해, 첫 성탄이 준비되고 있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2장은 이런 지극히 작고 사소한 이야기들과 함께,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아주 큰 일이 관련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 즉 로마의 황제 씨저를 통해서 이 일이 급속히 진행되었다고 보고합니다. 황제의 역할로 인해, 구약의 예언대로 세상의 구원자가 베들레헴에서 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요셉과 마리아가 이 모든 난관을 믿음으로 극복하면서, 그들이 살고 있던 나사렛에서 아이를 낳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때 로마 황제의 명령으로 인구센서스를 위해 모든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다윗의 자손 요셉은 그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약 미가 5:3에 나오는 말씀,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라는 말씀처럼, 마리아와 요셉이 베들레헴에서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유대땅의 아주 작은 마을에서 있었던 일을 위해, 당시 세상의 주관자였던 가이사 아구스도를 하나님께서 사용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수단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로마 황제를 통해서도 역사하셨듯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경륜 안에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시는 토대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과는 분명히 다르게 살아야 하지만, 세상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치와 사회, 그리고 이웃과 직장과 사업을 통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분명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신앙인은 민족과 국가를 위해 기도하며, 이 땅의 평화를 위해 행동해야 합니다. 통치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국가와 사회가 가능하면 하나님의 뜻에 가까운 일들을 결정하고, 그대로 시행하게끔, 마음을 모으고, 지혜를 모으고, 기도를 모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이 땅에서” 실현되도록 기도하고 참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분명히 세상의 황제를 통해, 구원의 때와 장소가 예언과 똑같이 이루어지도록 사용하셨다고 고백하면서, 또 다른 한 편으로 로마의 황제와는 전혀 다른 곳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소식을 제일 먼저 들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첫 성탄을 맞은 사람들의 이야기 말입니다. 그들은 바로 목자들이었습니다.

 

첫 성탄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마태복음에는 멀리서 별을 보고 온 동방박사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교양이 있고, 학식이 있고, 좋은 선물을 준비한 박사들의 이야기는 전혀 찾아 볼 수 없고, 잘 곳이 없이 들에서 양떼를 지키고 있던 목자들이 아기 예수의 태어난 소식을 들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목자들은 베들레헴 근방에서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밤에 양을 치는 목자들의 고생은 심했습니다. 밤에 양들과 함께 있는 목자들의 배고픔과 추위와 외로움은 컸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이 밤을 하얗게 새면서 이 고생하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관심이 없다는 “현타,” 즉 무서운 현실에 대한 인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세주가 태어났다는 소식은 그런 목자들에게 빛처럼 나타났습니다. 밤이 늦도록, 아니 때로는 밤을 새워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일을 하는 바로 그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나타나 구세주가 태어났음을 알렸던 것입니다. 구주의 나심을 전하는 소식을 듣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서움”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20에서도 요셉에게 나타난 천사도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30에서도 마리아에게 나타난 천사도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아이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무서워하는 목자들에게, 천사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했습니다. 온 백성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행동이 시작되었다는 복음이었습니다. 그렇게 밤이 지나도록 일을 한 목자들이 기쁨의 복음을 듣고 한 걸음에 달려가야 할 곳은 바로 베들레헴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들레헴 그 많은 집들 중에 과연 어디서 아이를 찾을 수 있을까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한 천사들은 목자들에게, 목자들만이 제대로 알 수 있는 표적을 일러줍니다. 그것은 바로 1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였습니다. 이것이 표적입니다. 목자들은 바로 이것을 보면 됩니다. 강보에 싸여 말과 소의 밥그릇으로 쓰이는 구유에 누인 아기입니다. 마태복음에 나타난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고 왔습니다. 별을 보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동방박사였고, 그들은 그들이 잘 아는 별을 보고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는 목자들이 잘 아는 마구간과 말구유에 놓인 아기라고 말합니다. 목자들에게는 자신들이 지겹도록 보아오고, 손에 못이 박히도록 치우고 청소하고 여물을 놓는 그 일을 하는 바로 그 속에 주님께서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목자들에게 전해진 구원자는 막 태어난 아기에 대한 어른들의 최소한의 배려와 예의, 그리고 관심도 가지지 못할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렇게 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을 위해 저 높은 하늘의 영광의 보좌를 포기하고 오셨는데, 정작 세상은 그 주님을 몰라봤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포기하셨으니, 그래도 세상은 알아주었어야 하는 것이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을 위해 오신 주님을 세상은 몰라봤습니다. 아니 무시했습니다. 철저히 무관심했습니다. 

 

목자들은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고작해야 양 몇 마리, 그것도 밤에 가둘 우리도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자들은 자신들의 가난으로 인해 볼 수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가난했기 때문에, 마구간과 구유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자신들의 잔뼈가 굵은 너무도 친숙한 곳에, 그러나 남들 보기에는 아주 초라하고 하찮은 곳에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너무 하찮아서, 그리고 너무 흔해서, 아니 너무 초라해서, 지겹도록 해온 일이어서, 내세우고 싶지 않은 그 일에, 그 장소에, 그 순간에, 오십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의 일이라 생각되지 않는, 우리의 생업의 터전에 말입니다.  

 

그리고 구유에 놓인 구세주를 맞은 사람들의 이름은 목자라는 이름이었습니다. 지금  가사도우미, 야간 당직자, 환경 미화원, 새벽 첫 차를 운행하기 위해 새우잠을 자고 나서는 운전기사, 그리고 비정규직이라는 이름, 일용직이라는 이름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분들에게 오셨습니다. 올해는 특히 방역의 일선에 서 있는 간호사, 의사, 그리고 확진자가 되어 이름도 없이 누워있는 이들과 그 가족들, 또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내고, 이 추운 겨울처럼 냉혹한 삶의 무게를 묵묵히 감당하는 그 소박한 이름에 오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아무도 종교적이지 않은 사회 한 복판에서, 곰팡이처럼 오래된 문제라 치부되는, 이 신앙에 대해서 그리고 예배에 대해서, 늘 한결 같이 흔들리지 않고 진지하게 임하는 그 사람들의 마음 한복판에 오십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신 목자와 같은 분이십니다. 목자들에게 존경을 받은 그 아이는 진실로 잃어버린 양과 같은 우리 인간을 위해 오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전혀 기대하지 못할 모습으로 오셨다는 사실은 우리 주님을 따르면 놀랄 일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기대와 예측과 계획을 아주 가볍게 반전으로 만드시는 그 방법을 기대하시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주님을 따르는 것은 전혀 다른 행복과 기쁨과 경이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가져다 줄 수 없는, 그러한 기쁨입니다. 이 기쁨이 주님이 우리에게 오실 때, 나타나는 기쁨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전혀 기대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하나님이 주시는 이 기쁨이 우리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목자들에게 전한 천사들의 소식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에게 평화”라는 복음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신비한 기쁨을 받아 누리면, 우리를 둘러싼 모든 환경을 통해 진정한 평화를 체험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황제나, 군사나, 식민지나, 물질적인 풍요함이 아니라, 하늘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평화요,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의 현실에 개입하시는 그 순간에 가능한 평화였습니다. 현대에 만연한 성공신화, 대형신화, 결과주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짐승 냄새가 나는 마구간의 구유에 나신 주님의 모습을 통해,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의 나타나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심”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순간에 평화가 있습니다. 이 척박하고 암울한 우리의 현실 한 복판에, 우리가 이제 다시 마음을 잡고 돌아가 굳건히 서고자 하는 삶의 한 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그분이 오셨을 때, 진정한 평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평화는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실 일은 결국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이 땅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이제 구원받은 우리들의 행동과 삶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주님을 따라서, 우리도 그 평화를 이루어내려는 삶으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밤을 새워 일하다가 구세주가 오셨다는 기쁜 소식을 듣고, 주님을 만나서 진정한 평화를 누린 목자들처럼, 무관심으로 치닫고 있는 이 세상 한 복판에서, 세상 그 어떤 이들도 관심 갖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그 일에 함께 하는 모두에게, 주님의 기쁨과 평화가 함께 하시길 진정으로 바랍니다. 점점 세상 사람들의 관심에서 잊혀지는 교회개혁과 구제와 봉사와 헌신의 일에서, 그리고 이렇게 애틋하게 주님의 신앙공동체를 만드는 일에서, 주님의 기쁨과 평화를 깊이 그리고 진지하게 누리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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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박창훈 2020.12.21 12:51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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