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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7일 예배 (박창훈 목사)설교말씀 요약 박경옥 2020-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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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으로 피하다”

(마태복음 2장 13절-18절)

 

마태복음은 전체적으로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복음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구조에 있어서 구약의 모세 5경을 따르고 있는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5개의 설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라는 표현을 기준으로, 실제로 5개의 설교의 윤곽이 나옵니다. 그렇다고 오늘 본문이 예수님의 설교에 해당하는 부분은 결코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그들이 떠난 후에”라고 시작합니다. 성탄절의 에필로그 정도로 한 아기가 태어나서 떠들썩했던 축하파티가 끝난 후의 이야기입니다. 이제 가족만 남은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멀리서 찾아온 동방박사로 인해, 한껏 부푼 첫 성탄절의 부산한 분위기는 한풀 꺾이고, 이제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그들의 아기만 남았습니다. 이제 이 가족은 현실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새로 태어난 아기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문제로 돌아온 순간,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현실은 숨이 막힐 정도로 시린 겨울바람처럼 냉혹하게 들이닥쳤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냉혹한 현실에서 가족의 가장이었던 요셉을 인도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꿈”이었습니다. 가족에게 닥칠 어려움에 대하여 알려주고 피할 길을 알려주는 것은 바로 요셉의 꿈이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아내가 될 마리아가 성령으로 아기를 갖게 된 것을 알려주는 1:20에도, 오늘 본문인 2:13에서도, 그리고 바로 뒤에 나오는, 애굽으로부터 유대 땅으로 다시 돌아올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2:19에서 주의 사자가 꿈에 나타나 알려준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2:22에서 유대가 아니라 갈릴리로 가서 정착하라는 것도 꿈에서 들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에서 성탄절의 이야기의 중심축에는 바로 요셉의 꿈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도 요셉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야곱의 자녀 가운데, 꿈 이야기 하다가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온갖 고생을 한 요셉을 형들은 “꿈꾸는 자”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꿈을 잘못 꾸어서 애굽으로 팔려간 창세기의 요셉처럼, 오늘 본문의 요셉도 꿈에서 주의 사자가 피할 곳으로 지시한 곳은 바로 애굽이었습니다. 도저히 꿈을 꿀 수 없는 상황, 도무지 긍정적인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현실, 도대체 왜 모든 일들이 날카로운 송곳과 바늘처럼 예리하게 가슴을 헤집는지 모를 그 상황에서, 요셉은 꿈을 따랐습니다. 그 꿈이 너무나 생생했기 때문이고, 그 꿈이 바로 자신의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대개 “꿈”하면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의 꿈은 허황된 망상이나, 공허한 야망이나, 포장된 욕심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의 꿈의 내용은 바로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살아보고자 하는, 살아야한다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의지에 부합하는 꿈이었습니다. 이렇게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려는 바로 그 꿈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꿈에서 들은 이야기가 이제 자신과 가족이 살아나갈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결국 그렇게 요셉의 꿈은 현실을 바꾸어놓는 힘이 있었습니다.  내년 저희 언덕교회의 표어를 김태완 목사님과 함께, “생명을 살리는 공동체”로 정했습니다. 지금은 가장 무섭게 창궐하는 이 감염병의 그림자가 내년에는 한풀 꺾일 것을 기대하고 소망하면서, 이제는 주변의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는데 더 관심을 갖자는 의미입니다. 요셉의 생명을 살리려는 그 꿈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음을 기억하면서, 생명에 대한 관심을 조금 더 기울였으면 좋겠습니다.

 

마태복음은 구약의 모세를 의식하고 있다는 흔적이 많다고 말씀 드렸습니다.모세가 바로를 피한 것과 요셉의 가족이 헤롯을 피한 것은 아주 유사합니다. 그 형식에서뿐만 아니라, 내용에서도 깊은 유사성이 있습니다. 모세와 요셉의 경우 모두 세속의 권력으로부터 피했다는 점에서, 특히 둘 모두에서 “피하라”는 표현은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피하라”는 것은 세상의 권력과 야망과 욕심을 대표하는 인물로부터 피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피하라”는 말은 분명히 신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실제로 이 “피하라”(anachorein)는 단어는 이후에 예수님께서 불신앙의 상태를 벗어나고자 할 때 반복해서 쓰신 단어입니다. 2:22에서 헤롯 아켈라오가 다스리는 유대 땅으로 “가기를 무서워하여,” 갈릴리로 갔다고 할 때도 이 표현이 있습니다. 4:12에서 세례요한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고 할 때도 동일한 단어입니다. 12:15에서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셨다는 사실로 바리새인들이 자신을 죽이려 할 때, 거기를 “떠나가시니”라고 할 때도 이 단어입니다. 그리고 14:13에서 헤롯이 세례요한을 죽였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에 가시니라고 할 때도 같은 단어입니다. 그리고 15:21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와서 음식을 먹을 때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는다는 것으로 비난할 때, 그들의 외식하는 모습에 대해서 책망을 하시고,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라고 할 때도, 바로 이 “피하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으로부터 피하라는 말은 언뜻 생각하면, 사회적인 의무나 책임으로부터 도망치라는 아주 무책임한 단어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피하라”는 의미는 사실 아주 강력한 신앙의 행동을 적극적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고난을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피하라”는 의미는 세속적인 권력과 야망과 욕심으로부터 벗어나서, 신앙의 본질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려는 적극적인 태도입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나아가, 오직 그분에게만 닻(anchor)을 내리려는 적극적인 의지입니다. 험난한 바람과 거친 파도가 있는 세상으로부터 밀어닥치는 어떤 조건이나, 형편이나, 상황에 흔들리지 않으려고, 오직 신앙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적극적인 행동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을 어떤 신앙의 인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신 그 십자가 나무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철저하게 한 몸이 되라는 것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피하라”는 말씀은 헤롯처럼, 죽음으로 몰고 가는 건강하지 못한 것들로부터 피하여, 정도를 가라는 것입니다. 건강하지 못한 정황, 건강하지 못한 세태, 건강하지 못한 가치관을 내려놓고, 적극적으로 건강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내라는 것입니다. 이 어려운 때, 우리를 죽음으로 끌어가려는 세상의 그 어떤 유혹으로부터도 피하여, 모두가 일상으로의 복귀를 갈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히려 이전의 일상에서 피하여,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신앙의 본질에 집중해야 할 수 있는 때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할 적극적인 행동입니다. 묵상과 성찰과 기도, 우리가 다시 새롭게 시작할 적극적인 행동입니다.

 

마지막으로,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가 아기 때, 이스라엘 백성이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바로가 이스라엘 사내 아기들을 죽이라고 산모들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오늘 본문도 한 아기를 죽이려는 잘못된 계획으로 인해, 많은 아기들이 죽어야 했다는 비극적인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탄절의 캐롤로 인해 행여 가려질 수 있는 “라헬의 애곡”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구약 예레미야 31:15의 본문을 인용하면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베들레헴에서의 유아학살을, 오래전 베들레헴 근처 라마에 무덤이 있는 라헬이라는 어머니의 고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바로 동시대의 유아학살 속에서 살아남은 자의 안타까움과 아픔과 고통을 안고 사신 분이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살아남은 자의 부채의식을 안고 사셨던 분, 그래서 우리의 아픔을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아픔을 기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문득문득 그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억으로 우리의 마음이 미치도록 사무칠 때, 그 깊은 한숨을 함께 토해내는 분이십니다.

 

시시각각 확진자들이 나오고, 그로 인해 안타깝게 숨을 거둔 이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데, 단순히 “나는 살았다”라는 사실에서,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증명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값싸게 말하는 것은 아니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함께 하지 못한 이들이 있는 이 때에, 자신의 생존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단어를 천박하게 떠올리는 것은 아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오히려 “왜 내가 아닐까?” “왜 아직 나는 아닐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보다 더 진지하게, 삶에 대해서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 우리의 태도를 세워야 할 때입니다.

 

오늘 본문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헤롯이라는 권력과 야망과 욕심의 화신이 비인간적이고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사람을 피하게 하시고, 구하셨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일이 있었다고, 하나님의 일이 유아학살 그 사선을 넘는 위험 속에서 피하게 하여 다시 돌아와 회복시키셨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그 모든 일이 가능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말합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은 우리가 잘 나서가 아니고, 우리가 그런 자격이 되어서도 아니며, 우리가 어떤 가능성이 있어서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로지 이유를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그 이유를 지금 우리가 안다면 은혜가 아닐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아직까지 우리를 데려가지 않으신 그분의 이유가 있겠지요. 분명한 것은 지금은 잠시 피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 우리가 한 사람씩 그리고 마침내는 다 같이 갈 그 길입니다. 그런데 아직 아니라면, 그래서 우리가 한 해를 마무리하고 다시 새로운 해를 맞을 수 있다면, 그 잠깐의 시간의 여유와 틈을 주신 바로 그 이유를 찾기 위해서, 묵묵히 그리고 진지하게 일어서서 자신에게 맡겨진 삶을 살아나가야 합니다.

 

요셉처럼 사람을 살리려는 꿈에 같이 하시는 하나님, 세속의 권력과 야망과 욕심으로부터 피해서 본질적이고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 다시 시작할 것을 재촉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지금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이 해를 진지하게 마무리할 여유를 주신 하나님과 늘 함께 하기로 새롭게 다짐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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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박창훈 2020.12.30 19:09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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